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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품

정병국, 무제, 캔버스에 아크릴, 1995
바다를 바라보는 세 남자의 뒷모습을 그린 것일까? 크기를 달리하지만 한 사람의 앉은 모습을 반복시켜 놓은 이미지 같다. 정확한 의미를 알 길 없는 이 그림은 하나의 알레고리다. 작가는 바닷가에서 우연히 목격한 한 사내에게서 착안했을 수도 있고 공허한 자신의 내면을 투영한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상징하는 내용을 종잡을 수 없으나 그것은 동시대 미술의 속성이 돼버린 논리적 난관이지 오류 때문은 아니다. 이 작품에서처럼 현실로부터 분리한 이미지를 의외의 맥락과 연결하게 되면 개개의 상이 본래 가지고 있던 뜻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작동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새로운 의미로 확장을 일으킨다. 상징적인 세 사람은 길 위에 있으며 바다와 하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전혀 합리적인 묘사가 아니다. 디테일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균질하게 칠한 색채는 평면적이다. 합리적인 재현에서 벗어나 어딘가 낯선, 파악되지 않는 의미가 불편함을 준다. 부조리한 비례나 반복이 긴장을 만들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 의문을 더한 것이 이 그림의 의도인지 모른다. 이처럼 서사적인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표현하기 힘든 어떤 감정을 시각적인 느낌으로 전달하려는 것이 목적인지 모른다. 색채도 우울한 혹은 사색에 잠기게 하는 청색과 회색이 주조를 이룬다. 팝아트의 계열 같으나 광고나 대중적인 이미지 대신 정병국은 자신의 내면에서 특히 몽환적 이미지를 찾아냈다. 게다가 인물의 표정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관객의 사색을 유도한다. 개념미술과 신구상회화의 영향이 크다.

『소장품 100선』, 대구미술관, 2019